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St. Kim Dae Geon Adreas)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초상화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미남형이다. 게다가 10 대에 라틴어를 유창하게 쓰고 구사했다는 데서 그 분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다.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김제준의 아들로 1822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서 태어났고 일곱 살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으로 이사해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성인의 가문이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는데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공소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최양업, 최방제 두 소년이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중국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는 등 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김대건은 그 해 7월11일에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1837 년 모방신부의 소개로 중국 마카오로 건너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칼레리신부로부터 신학과 다른 서양학문, 프랑스어, 중국어 및 라틴어를 배웠는데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들은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였다.
1842년 20세 때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몰래 들어오기 위해 의주를 거쳐 서울로 잠입하려했으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와 감시가 너무 심해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두 번째로 두만강을 건너 들어오려 했지만 실패하고 마카오에서 얼마 동안 공부를 더 하다가 1844년 12월 두만강을 통한 2차 입국시도도 실패하자 마카오로 돌아갔으며 그 해 12월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에 못 미쳐 아쉽게도 사제품은 받지 못하였다.
드디어 1845년 성인은 무사히 변문을 통과하여 1월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다시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여 4월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40여일 만인 10월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한양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전교를 통한 교세 확장에 전념하였다.
성인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 등을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2개월 간이 조선에서의 사목방문 활동기간의 전부였다.
성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 부교구장이었다. 성인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 가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으나 그 곳에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해수감영으로 이송되었다가 6월 21일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성인은 포도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그 때 나이 26세였다. 성인의 시신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대학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새남터를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5월 6일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